출저 : http://biblicalcounseling.or.kr/ [ KABC ] - 일반자료실 - 김주원박사 (님)의 글.

Article by Kim, C. Hong, Ph.D.

들어가는 말

1999년 2월에 한국에서 발간된 이윤호 목사의 책,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 (서울 : 베다니출판사, 1999)는 발간된 지 닷새만에 2판 인쇄에 들어갈 정도로 한국에서는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책과 짝을 이루는 메릴린 히키(Marilyn Hickey)의 책,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서울 : 베다니출판사, 1997)는 한국 기독교 서점 평신도 부문 판매순위 1위를 수개월 동안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널리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필자는 저자의 책을 읽고, 놀랍게도 이 책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내용에서 상당히 빗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도로서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 책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경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윤호 목사의 가계저주론

이 목사의 책의 제 1장은 1986년 가을에 일어난 그의 여자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자신의 깊은 묵상으로 시작한다. 그 자매는 저자와 대학시절 함께 선교활동도 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p.15), 불신자가 아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음이 분명하다. 해외 근무를 하던 남편을 따라 피지 섬에서 살던 그 자매는 “백혈구와 적혈구 수의 균형이 갑작스럽게 깨어지는 어떤 병”(p.16)에 걸려 급사하였는데, 그녀의 남편을 만나 위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목사는 불현듯 “그 병의 원인이 가게를 통한 유전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p.17)이 들었다. 그 친구의 가계에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그 때부터 제자는 그 집안에 내려오는 “이런 질병의 저주를 끊었더라면, 내 친구는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로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의 죽은 친구의 백혈구와 적혈구의 숫자의 균형이 깨어지는 병과 그 집안의 정신병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되는 것인지에 대한 전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비하게 들리는 그 문단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내 주관적인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 후 나는… 가계치유(Generation Healing)가 ‘삶과 죽음’의 아주 중요하고 긴박한 문제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p.17). 즉, 친구의 죽음에 대한 어떤 객관적인 이해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주관적인 추리와 비범한 논리적 비약을 통해 이목사는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어떤 진리에 도달하였다는 것인데, 그 진리란 바로 그의 독실한 기독교인 친구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으로 얼버무려진 이 첫 에피소드 이후 그는 많은 지면을 낭비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표현하는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조상의 죄는 후손에게 유전된다.
2.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유전된다.
3. 유전적 죄는 죄의 뿌리를 끊지 않는 한, 가계를 타고 계속 내려간다.

이러한 주장들을 거쳐서 이목사의 책 63쪽에 이르면 독자들은 실로 놀라운 그의 주장과 마주치게 되는데, 굵은 활자로 강조되어 있는 이 주장은 다름 아닌 “성경은 신자가 저주 아래 살 수 있음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151쪽에서 그는 심지어 “당신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다고 해서 당신이 모든 저주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도 가계의 저주 문제를 해결 안 하면 여전히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주장이 성경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 올바른 것인가? 필자의 대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필자는 --아마도 저자와 똑같은 성경을 읽고 있다고 믿는데 -- 성경에서 오히려 상반된 증언을 듣는다. 그것은 바로 “성경은 신자가 더 이상 저주 아래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증언한다”이다.


가계저주론은 성경적인가?
이윤호 목사는 가계저주론(Generation Curse)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책 88-91쪽에서 하나님이 조상의 죄를 후손에게서 찾는다는 것을 지지하는 성경구절들을 열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5),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민 14:18),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 (렘 32:18) 등이다. 그리고 나서 저자는 이 구절들을 근거로 “하나님은 조상의 삶이 자손에게 반드시 어떤 종류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영적 법칙을 설정하셨다”(p.92)고 엄숙히 선언한다. 이 인과응보의 법칙은 “하나님이 정한” 법칙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이전과 이후의 모든 인간의 모든 행위에 예외 없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pp.140-144).

그런데 이목사가 가계의 저주가 성경적 원리임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한 성경구절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것들이 모두 구약성경에 나오는 구절들이란 점이다. 그는 조상의 저주가 후손에게 미치는 이 신적인 영적 법칙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구절들을 신약성경에서 인용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자명하다. 구약성경에 언급된 율법의 저주의 문제가 이미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해소되었고, 신약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이목사가 발견한 영적 법칙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더 이상 조상의 죄에 대한 책임을 후손에게 묻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화해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목사는 자신의 가계저주론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일부 구약성경 구절들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하고 있을 따름이다. 성경적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으면, 그는 먼저 가계저주론이 신약의 복음 속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 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가계저주론을 신약성경적인 것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은 기독교 복음이 계시되어 있는 새 언약의 책에 기초해 있지 않으며, 옛 언약의 책의 일부의 구절들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스스로 “새 언약의 일꾼”(고후 3:6)이 되기를 포기했으며,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갈 3:18) 어리석은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윤호 목사는 왜 이런 실수를 범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그가 신약성경에 기초해서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개신교 성경해석의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구약성경을 놓고, 기독교와 유대교는 그 해석을 달리한다. 기독교인은 똑같은 구약성경이라 할지라도, 유대교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약을 해석한다. 우리들은 예수가 구세주이며, 그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복음의 빛 아래에서,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의 빛 아래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하므로, 복음의 빛 아래에서 구약의 가계저주에 관한 구절들을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거꾸로 구약의 가계저주에 관한 몇몇 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복음을 재해석하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이며 궁긍적으로 복음의 능력을 무효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복음은 가계저주론을 무효로 만든다

신약의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의 저주로 인한 문제에서 인간이 풀려났음을 명확히 증언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4:3에서 인간이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 세상 초등학문”이란, RSV나 NRSV 영어성경에서는 “the elemental spirits of the world"로 번역되었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시고(4:4),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게 하셔서, 인간이 그의 아들의 명분을 얻어(4:5)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으므로(4:5), 이제 더 이상 그런 영적 존재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지만(4:8), 이제는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으므로 (4:9), 절대로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당시 갈라디아 교회 안에도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의 영향력을 겁내고, 죄로 인한 율법의 저주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바울은 이런 염려로부터 성도들이 이미 놓여졌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3:13)했기 때문이다. 이목사처럼 구약의 가게저주에 관한 몇몇 구절들을 근거로 하여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효력을 약화시킨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가계저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바울이 던졌던 바로 그 질문, “당신들은 그렇게 어리석은가?”(갈 3:2)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윤호 목사가 열심히 인용하고 있는 구약의 구절들은 최소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그 유효기간이 지나간 율법이 “몽학선생”(3:24) 노릇하던 시대의 옛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흘러간 옛 이야기를 다시 들추어내면서, “신자들도 자주아래에 있다”는 신약성경의 말씀과 상반되는 주장으로 성도들을 협박하고, 또 교회를 향해서는 “영적 전쟁”의 선전포고를 하는 것일까?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선언한,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다”는 것을 읽지 못한 것일까?

독자들은 130쪽에 이르러 다행스럽게도 그가 이 갈 3:13-14을 알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성경인용 직후에 저자가 덧붙인 말, “우리 신자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느낌표는 이목사의 것)를 읽고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왜냐하면 그가 곧 이어서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났는가?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한 당신의 영, 혼, 육에 임한 저주 중 어떤 저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신자가 “영”은 자유함을 얻었지만 “혼”과 “육”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신자가 영만 구원을 받았고, 혼과 육은 저주 아래 있다는 그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는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이런 주장은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선언한 뒤에, “예수가 그리스도인가?”라고 자문하고, “예수는 우리 영만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다”고 결론 내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혼과 육까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목사의 처방은 그의 “가계점검표”를 사용하여 조상들의 죄를 일일이 알아내어 그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져도 겨우 우리의 영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가계점검표를 사용해서 가계의 저주를 끊지 않고는 우리의 혼과 육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성경은 왜 이 심오한 진리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인류역사에 이윤호 목사가 등장하기 이전에 안타깝게도 그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이미 죽어간, “가계저주”를 끊지 못한, 수많은 성도들의 혼과 육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 안에 있고, 성령은 그들 안에 있다고 말하는데(롬 8:9), 성령이 겨우 성도들의 “영”밖에는 거하지 못하고, “혼”과 “육”은 악령들과 저주의 지배아래 내버려 둘 정도로 무력하단 말인가? 가계의 저주를 끊지 못한 성도들에게 들어 있는 악한 영들이 후손에게 계속 전해진다면(p.117), 성도들은 실제로는 악령 안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고 (필자가 이목사 본인과 전화통화로 확인한 것인데, 그는 교회 성도의 약 80%가 영적 전쟁의 대상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곧 교회가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령 안에 있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장인가?

그런데 136쪽에서 이목사는 솔직하게도 성경 내용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구절이 없음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영적 전쟁 전문가 클린턴 아놀드 박사의 주장과 같이 가계치유의 정당성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성경적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많은 성경구절은 가계치유를 간접적으로 지지한다”(p.136) 왜 성경은 인간의 혼과 육의 구원이 걸려있는 이 중요한 문제를 겨우 “간접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점은 이 가계저주론 자체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저자는 140쪽에서 “가계치유를 성경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굵은 글씨로 써서 주장하는데, 어떻게 성경이 직접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 주장을 그는 “성경적 진리”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지 실로 그의 비논리적인 강변에 필자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윤호 목사는 자신의 주장이 그저 책상머리에 앉아서 쓴 책이 아니라, “수년간에 걸쳐 수많은 환자들을 만난”(p.11) 그의 임상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것을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임상경험에 대한 이목사의 해석은 우리가 읽는 성경의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가? 이것은 이목사가 성경(text)보다는 자신의 경험(context)을 우위에 두고 자신의 경험에 따라 성경의 가르침조차도 수정하기 때문이 아닌가?” 필자는 개신교 목사가 복음의 핵심에 어긋나는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을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이며, 이 문제에 대한 이목사 본인의 정중한 변명을 기대한다.

골로새서의 집필목적과 골로새 이단의 주장들

필자는 가계저주론과 같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영적 존재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데, 그 중 골로새서는 이런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인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이다. 그렇다면 당시 그로 하여금 편지를 쓰게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골 2:4에서 바울은 그 집필 목적이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한다. 2:8에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규정된 이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 바울은 이것들이 “너희들을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경고하는데, 이 말은 이 헛된 속임수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노획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가져가는 물건 혹은 포로--로 끌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다수 신약학자들이 골로새 이단(Colossian Heresy)이라고 부르는 이 가르침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그 이단의 요점을 정리해서 설명하지는 않으므로, 우리는 바울의 비판을 통해서 그들의 주장을 재구성해야 한다. 2:18절은 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당시 유대교 안에서 천사숭배는 매우 드문 현상이었으므로, 우리는 이 천사숭배가 헬라문화/종교에서 들어온 종교혼합주의의 결과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당시 헬라인들은 나름대로의 우주관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에 따르면 1) 하늘과 땅은 여러 종류의 영적인 존재들로 가득 차 있고, 2) 이것들은 신적인 충만(fullness)에서 유출되어 나온 것들이며, 3) 그 영적인 존재들이 인간의 운명과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4) 인간이 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길목을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골로새 교인들 중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뒤에도 여전히 그들이 예전에 믿던 헬라 민간종교의 세계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천사들(영적인 존재들, 악한 영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그들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1:16에서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데, 바로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골로새 이단이 두려워하라고 가르치는 대상들이었다. 같은 절에 나오는 “보좌,”, “주관”, “정사”, “권세”등은 바로 당시에 알려져 있던 영적 존재들의 아픔들이다. 골로새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러한 영적인 존재들의 위협과 저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능력이 있음을 부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가 이런 영적 존재들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큰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는 1:15-20의 찬송시에서 그리스도가 이런 영적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분임을 선포하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유출된 저급한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 자”(1:15)이다. “만물이 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16),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1:17) 서 있으므로, “그리스도는 만물의 으뜸이다”(1:18).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하늘의 보이지 않는 악한 천사들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의 골로새 이단 비판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고”(1:14)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골로새 이단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결코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1:13)이미 옮기셨다는 것인가.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에서 빛으로 옮기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신(1:20) 십자가 사건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한”(2:15) 사건이라고 말한다. 2: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어둠의 권세를 향해 거둔 승리를 묘사하기 위해 당시의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그림언어를 동원한다.

그것은 승리한 장군의 개선행진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에 무장을 해제한 적군들을 포승에 묶어 끌고 들어옴으로써 그들을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든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정사와 권세” (골로새 교인들이 겁내는 영적인 존재들)를 “벗어버려”(무장해제하여), “밝히 드러냈다”(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이러한 승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바울은 “십자가로 승리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2:20에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여기에서 초등학문(악한 영적 존재들)에 대해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숙어적인 표현으로서, 우리가 더 이상 그것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영적인 존재들은 이미 무장해제 당했고, 성도들은 승리한 개선장군이신 예수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이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선포하는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윤호 목사는 성도들이 여전히 악한 영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는가? 그것은 이목사가 그리스도를 쫓지 않고 메릴린 히키의 귀신론과 같은 “사람의 유전과 초등학문”(2:8)을 쫓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우리가 조상의 죄로 인한 저주 아래 있고, 하나님이 결코 그 목록을 잊지 않고 일일이 후손에게 책임을 묻는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는데, 필자는 그가 2:14의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를 어떻게 해석할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 “하나님께서는 법 조항에 따라 우리들에게 대항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증서를 파기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아 우리들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시고,” 여기서 “법 조항에 따라”는 율법의 규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율법의 규정에 의거했을 때 당연히 나타나는 인간의 규정위반들을 기록해 놓은 인간들에게 불리한 증서--마치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채무관계를 기록해 놓은 장부와 같은 것--를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아서 없애버리셨다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의 목록을 이미 예수의 십자가와 더불어 다 삭제하여 버리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가계의 저주를 끊기 위해 그의 독자들에게 사용하라고 만들어 준 “가계점검표”(p.154)와 저주를 끊는 수많은, 그의 기도문들은 실제로 만들 필요도 없으며, 그것을 사용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게 일일이 그 목록을 읽어가면서 가계저주를 끊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당황하게 만들뿐이며, 이런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미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2:23)고 말씀하셨다.

“초등학문”(악한 영들)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가계저주론은 성도들이 복음의 능력을 믿는 은혜의 복음을 성도들이 의심하게 만든다. 성경은 이목사의 주장이 틀렸고, 그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초등학문”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갈라디아 교회에서 발생한 문제(갈 4:3,9)에 대해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고 말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은혜를 이목사는 왜 무효로 만들려고 애쓰는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조상들의 죄로 인한 저주 아래에 놓여 있다면 그리스도가 “헛되이” 죽었다는 말인가? 바울은 갈 1:8-9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하나님의 저주가 있으리라고 말한다.

가계저주론과 샤머니즘

이윤호 목사의 가계저주론을 읽어보면, 이것의 저변에는 복음이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의 메시지가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샤머니즘의 가르침, “저주를 풀고 그 대신 복을 받으라”는 설교를 듣게 된다. 그의 책 11장 “저주를 복으로 바꿔라”에서 이목사는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가계점검표를 사용하여 가계의 영적 뿌리를 추적하고, 그가 만들어 놓은 기도문들을 사용해서 그 저주를 끊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조상의 죄로 인한 저주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목사의 가계저주론이 왜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큰 저항 없이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가계저주론이 결코 복음에 부합하지 않는데도, 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필자는 그 이유를 많은 한국인들의 심성에 깊이 뿌리박힌 샤머니즘적 세계관 때문이라고 본다. 저주/축복의 이분법, 흉(凶)을 길(吉)로 바꾸기 위해 푸닥거리를 통한 액땜을 하도록 가르치는 이 무속신앙은 신자이거나 불신자이거나에 상관없이 많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 성도들이 가계저주론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 안에 있는 “기복신앙”이 샤머니즘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되었음을 동의하는데, 가계저주론은 복을 비는 것이 아닌 저주를 끊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기복신앙과 정반대 되는 것 같아 보이나, 실제로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샤머니즘에서 생겨난 또 다른 변종인 것이다. 다시 말해 기복신앙과 가계저주론은 샤머니즘의 아들이요, 딸이며, 난형난제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저주를 끊고, 복을 받으라”는 이 메시지는 기독교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샤머니즘의 가르침인가?

방향이 잘못되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사/선교사는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을 먼저 이해하고, 복음을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표현으로 증거해야 한다.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는 이 과정을 우리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 혹은 토착화(indigenization)라고 부른다. 문화인류학의 도움을 받는 현대의 모든 선교학 이론들은 바로 이 개념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상황하는 선교현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복음에 대해 소개를 받는 사람들(receivers)이 보다 더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교회와 선교사/전도자들은 복음을 재해석하는 과제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유념해야 할 것 한 가지는 이 상황하의 방향이 “교회에서 세상으로”라는 것이다. 복음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아갈 때에 상황화가 필요하고, 복음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길흉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무당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저주와 복”이라는 개념에 기초해서 복음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선교사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필요하고, 또 그 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이목사의 가계저주론은 그가 선교사로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의 가계저주론은 복음이 교회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샤머니즘이 세상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가계저주론은 복음이 샤머니즘의 토양(context)에서 상황화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샤머니즘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기독교를 토양(context)으로 해서 토착화 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방향이 잘못되었다!” 이목사는 샤머니즘 토양의 선교지에서 기독교 선교사가 해야 할 일을 자처해서 교회 안에서 하고 있다. 그는 복음을 갖고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않고, 거꾸로 샤머니즘을 갖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기독교 복음을 가장한 샤머니즘의 메시지를 유포시키고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샤머니즘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런 기독교 복음을 가장한 가르침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뿌리를 끊어야 한다. 한국교회 안에 흐르는 이 끈질긴 샤머니즘의 뿌리를 잘라야 교회가 건강해진다.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필자는 이목사의 주장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 중에서 교회에 대한 그의 이해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자신의 교회 이해가 무엇인지 별도로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책의 곳곳에서 발겨되는 그의 교회 이해는 한국교회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교회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고, 이것 때문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다. 교회의 시작은 오순절 사건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받아(행 1:8), 복음 전파를 위해 무장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에게 성령이 임하신(마 3:16) 시점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교회가 받은 성령은 곧 그리스도가 “보낸”영이기도 한데(요 14:26 ; 15:26 ; 16:7), 이것은 교회가 성령을 다른 매개를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았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오심으로, 성령은 형상이 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고, 육체를 가진 인간, 곧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옷 입혀져” 우리들에게 주어졌으며, 동일하신 그리스도가 지금도 교회 안에 계신다. 따라서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교회에 임재할 뿐 아니라,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in Christ)”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이해되는데, 바울에 의하면,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너무나 견고해서,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악한 영들)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성도들을(혹은 교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할 수 없다고 한다 (롬 8:38-39).

만약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교회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하려는 시도이며, 이렇게 성령의 능력 아래 있지 않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목사의 가계저주론이 갖고 있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교회가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주장을 근거로 하면 가계의 저주를 푸는 것 이외의 교회의 어떤 사역도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그가 경험한 가계저주 임상사례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C집사”(p.61), “선교사 자녀 K군”(p.73), “P형제”(p.87), “죽음의 영에 사로잡힌 L집사”(p.173), “P여집사”(p.180), “슬픔의 영에 사로잡힌 L남자집사”(p.184) 등과 같이 모두 성도들임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그가 가계저주에 빠진 사람들로 성도들만 열거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저자는 예수를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악한 영들은 이미 침입”(p.183)하였고, 예수를 믿었다 해서 악한 영들이 도망가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그들이(성도들이) 예수를 믿을 때 모든 악한 영들이 도망간 것으로 간주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거주 장소를 영에서 혼과 육체로 이동한 것에 불과하다”(pp.183-4)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면 우리는 이상한 교회론에 도달하게 된다. 성도들의 “혼과 육체”에 악한 영들이 “거주”하고 있다면, 결국 그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각종의 악한 영들이 우글우글 거리는 악령들의 소굴에 불과하다.

또, 이목사 말대로라면 악령이 들린 장로, 권사, 집사 등, 평신도들을 통해 교회가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성도가 갖고 있는 성령의 은사에 따른 평신도 사역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목사의 가계저주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가 아니라 “악령의 능력 아래에 있는 교회”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왜곡된 교회론을 배경으로 해서 교회는 도대체 무슨 사역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 그의 책 뒷부분에 암시되어 있다고 본다.

가계저주론의 저주

위와 같은 이윤호 목사의 파격적인 교회 이해는 곧 “가계를 통해 이미 들어온 무단 침입자인 악한 영들을 어떻게 추방할 것인가”(p.184)의 문제로 독자들을 몰아간다. 그리고 그는 184페이지에서 이 “축귀사역”이 곧 그의 근본적 “관심사”임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즉, 가계저주론의 궁극적인 의도(hidden agenda)는 다름 아닌 “축귀사역”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목회자가 가계저주론을 받아들인다면, 교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 그는 당연히 축귀사역에 가장 중요한 관심을 두고 목회를 하게 된다. 아마도 그는 먼저 이목사가 세운 “가계치유학교”에 가서 그의 귀신론을 깊이 공부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교회에 돌아가서 가계저주를 푸는 축귀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아무리 열심히 축귀사역을 하더라도, 절대로 축귀사역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발겨하게 돈다. 왜 그런가? 만약 당신이 가계치유학교에 등록하려고 마음먹었다면, 등록금을 내기 전에 그의 책 189페이지를 꼼꼼히 읽어보기를 필자는 충고한다. 이목사가 그곳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에게 가계치유를 받은 환자들은 ‘가계치유 기도를 한 번만 받으면 충분할까요?’라는 질문을 종종 던진다… 나는 ‘당신이 아플 때, 언제까지 병원에 갑니까?’라고 반문한다. ‘치료될 때까지 치유를 통해 문제의 뿌리를 절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를 완전히 절단할 수는 없다.”(p.189 강조는 이윤호 목사의 것). 여기서 안타깝게도 저자는 그의 독자들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완전히 끊을 수 있다는 낙관주의에 빠질 기회를 결코 주지 않는다.

그가 책의 본문 여러 곳에, 또 부록에 따로 실어놓고, 독자들에게 사용하라고 강권한 “가계치유 기도문”은 별 신통력이 없는 주문(呪文)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한 번 외웠다고 해서 안심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189페이지 이하의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이 땅위에 완전에 도달한 기독교인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가계의 저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도 없다는 절망적인 메시지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가계점검표를 사용해서 조상들이 범한 모든 죄를 다 알아내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덧붙여, 일단 쫓겨난 악령들이 다시 돌아오기 위해 우리들을 계속 공격하고, 신자들은 이 공격에 넘어질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p.197). 따라서 우리는 계속 이 가계저주를 끊고, 귀신을 쫓아내되 죽을 때까지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가계저주론에 한 번 걸려들면 우리들은 영원한 축귀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됨을 필자는 모든 독자들에게 경고한다. 거기에는 복음이 가져다 주는 자유함이 결코 없다. 죄용서와 은혜로 없다. 구원의 기쁨도 감사의 축제도 없다. 그곳에는 저주만이 있을 뿐이다.

유전인자를 통한 전달?

이윤호 목사가 그의 책에서 열거하는 수많은 난센스 중에 압권은 역시 유전인자(genes)를 통해 가계저주가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그의 주장이다(p.113). 그는 조상의 죄와 저주가 후손에게 전달되는 통로로 다섯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유전인자를 통한 전달이다. 필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목사와 유전인자를 통해 가계저주가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주장만 할 뿐, 달리 그 주장을 지지하는 아무런 연구도 소개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당시 인도네시아에 있던 저자에게 국제전화로 직접 이 문제에 대해 질문한 바가 있다.

필자의 질문은 현대 의학, 생리학, 혹은 유전공학의 연구들 가운데, 그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연구결과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이목사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할 수 없으면서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하느냐고 필자가 재차 묻자, 그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대답을 하였다. 이에 덧붙여 더욱 필자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히브리서 7:9-10의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유전인자를 통한 저주의 전달을 설명하려는 그의 용감한 시도이다. 불행하게도 필자는 이 구절을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아브라함과 레위의 유전인자를 통해 어떤 축복과 저주가 전달되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성경적 가르침을 얻을 수 없었다.

이윤호 목사는 그의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은 수많은 진리를 담고 있다”(p.11)고 자신의 책을 스스로 칭찬한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글에서 증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수많은 진리”를 담고 있기는커녕, 수많은 오류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우리가 “진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 주장할 수 있는 책은 세상에 단 한 권 밖에 없으니,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펴면서도 용감하게도 자신의 주장을 진리라고 부른다. 그의 이러한 난센스는 그의 책 서문에 나타난 그의 독특한 “독자돼지론”에서 절정에 이른다. 서문에서 이목사는 “최소한 당신이 미련한 ‘돼지’가 아닌 한, 이 책은 당신의 생애를 바꿔 놓을 수 있는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책이다”(p11, 강조는 이목사의 것)고 엄숙히 선언한다.

다시 말해 그의 책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은 “돼지”라는 것이다. 게다가 독자들을 더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이와 같이 독자를 “미리” 모욕하는 말을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는 성경 말씀을 인용함으로, 거룩한 선언으로 둔갑시키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이다. 그는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독자들을 돼지라고 부름으로써, 독자들을 순간적으로 긴장하게 만들고, 책의 본문을 읽기도 전에 “나는 돼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목사는 그의 독자들을 준엄한 양자택일의 기로에 세우고,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우리는 졸지에 돼지가 된다!)가 올 것인지 위협한다.

자신의 책에 대한 그의 이러한 태도는 신학적인 견해에 대한 의문을 넘어서서, 신학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자세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한다.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을 가정하고, 그들의 비판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갖는 것이 학문을 연구하는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목사는 그의 견해에 동의 없는 사람들의 비판을 미리 봉쇄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적절하지 못한 태도일 것이다.

영적 전쟁의 싸움터는 어디인가? 계룡산인가?

이윤호 목사의 가계저주론의 근저에는 그의 왜곡된 인간이해가 도사리고 있다. 그는 성경이 가르치는 전인적인 인간이해와 대립되는 “영, 혼, 육”으로 찢겨져서 성령과 악령의 지배를 동시에 받는 정신분열적 인간관을 대변한다. 이런 인간관을 따르는 영적 전쟁의 전문가, 대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주저 없이 교회를 영적 전쟁의 장(場)으로 선택하고, 성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자신들의 지상과제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틀렸다. 왜 그런가?

원래 현대 선교학에서 영적전쟁(Spiritual Warfare)이 관심을 끌게된 동기는 복음이 교회 밖으로 나가면서, 교회 밖에서(교회 안이 아니다!), 즉 선교의 장에서 나타나는 성령과 악령의 충동(Power Encounter) 현상 때문이다. 이런 충돌은 선교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로 개종과 교회의 설립이라는 열매가 반드시 맺어져야 한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런데 이목사는 악령의 영향 아래에 있는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은 하지 않고, 거꾸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향해 “엉뚱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목사와 그 아류의 영적 전쟁 전사들에게 호소한다.

이제 제발 교회를 떠나라고, 차라리 계룡산으로 가달라고.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당, 보살, 점쟁이, 각종 도사, 선녀, 자칭 산신령들을 찾아가 용감하게 영적 전쟁을 하고, 그들을 예수에게 인도하고 교회를 세워 당신들이 영적 전쟁의 전문가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영적 전쟁이 복음 전파에 유용한 방법임을 실례를 통해서 증명해 달라고.

가계저주론을 끊는 우리의 무기

이윤호 목사의 가계저주론을 한국교회에서 끊어 버리기 위해 우리는 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한”(히 4:12)무기를 주셨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 무기는 지금 우리의 손에 들려져 있다. 성도들은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고전 1:18)을 신뢰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교회의 선생들은 교회로 침투해 들어오는 잘못된 가르침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칼로 막아내는 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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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by Kim, C. Hong, Ph.D.
Fuller Theological Seminary, CA